나는 렌즈를 오래 들고 다녔다.
정확히는 육 년이다. 산을 넘어갈 때도, 비가 올 때도, 한 번은 제주 바다에 빠뜨릴 뻔한 적도 있었는데 그날 나는 손을 뻗어 허공을 낚아챘다. 그 렌즈가 나를 알아보는 것인지, 내가 그 렌즈를 알아보는 것인지 모를 지경이었다. 조리개를 돌릴 때마다 나는 무언가를 깎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방망이 깎는 노인처럼. 한 번 더, 한 번 더, 조금만 더 얇게. 빛을 받아들이는 일이 그런 것이었다. 서두르지 않고, 남이 뭐라 해도 내 손끝이 알 때까지.
그 렌즈를 팔았다.
이유는 단순하다. 그녀의 생일이었다.
중고 거래 앱을 열었을 때 손이 조금 떨렸다는 것은 쓰지 않겠다. 어차피 사실이 아닌 척할 수 없으니까. 떨렸다. 사진 한 장을 찍어 올렸는데 조명을 세 번 바꿨다. 팔리는 물건이 좋아 보여야 한다는 게 아니라,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제대로 찍어주고 싶었다. 다른 카메라로, 다른 렌즈로. 그 렌즈가 받아들이던 빛을 이번엔 반대편에서 찍었다. 어색했다.
연락은 금방 왔다.
돈을 손에 쥐고 나는 꽃집으로 갔다.
오늘은 운수 좋은 날이었다.
아니, 그렇게 생각했다. 흰 작약과 라넌큘러스를 섞은 꽃다발을 샀고, 작은 상자 하나를 더 샀다. 상자 안에는 귀걸이가 들어 있었다. 반달 모양의 은빛 귀걸이. 그녀가 지나가다 한 번 들여다본 적 있는 가게에서, 그녀가 들여다봤다는 걸 내가 기억하고 있다는 걸 그녀는 모른다. 봉투를 두 개 들고 골목을 걷는데 오늘은 이상하게 날씨도 좋았다. 햇빛이 옆으로 누워 들어오는 시간이었다. 사진을 찍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가, 렌즈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가,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관문을 열기 전에 문자가 왔다.
오늘 야근이야. 늦을 것 같아.
나는 한참을 서 있었다. 꽃다발이 팔에 걸린 채로. 열쇠는 이미 구멍에 들어가 있었다. 돌리지 않았다.
현진건이라면 이 대목에서 인력거꾼의 아내를 죽였을 것이다. 나는 다행히 그 정도는 아니었다. 다만 한참을 섰다. 운수 좋은 날의 끝이 늘 이렇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지 않았던가.
문을 열고 들어가 꽃을 꽂아두고 귀걸이 상자를 탁자에 올려두었다. 창문을 열었다. 바람이 들어왔다.
까마귀였다.
제주에 까마귀가 많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래도 이건 좀 너무했다. 창틀에 앉은 녀석이 탁자 위의 작은 상자를 보더니, 정확히 두 번 고개를 갸웃하고는 부리로 낚아챘다. 반달 귀걸이가 든 상자째로. 그리고 날아갔다. 한라산 쪽으로.
나는 잠시 생각했다.
쫓아가야겠다.
까마귀가 사라진 방향을 따라 걷다 보니 어느새 오름 아래였다. 사람이 없었다. 해는 기울어 있었다. 그리고 바위 틈새에 — 분명히 전에는 없던 — 검은 입구가 있었다.
열려라, 참깨.
입 밖으로 낸 게 아니라 마음속으로만 중얼거렸는데, 입구가 열렸다. 이런 일이 생기면 놀라야 하는 건지 아닌 건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안으로 들어갔을 때,
13인의 아해가 道路로 疾走하오.
(길은 막다른 골목이 적당하오.)
나는 공포에 질려도 되는 것이오, 질리지 않아도 되는 것이오. 제1의 아해가 무섭다고 그리오. 제2의 아해도 무섭다고 그리오. 제3의 아해도. 제4의 아해도. 제5의 아해도. 제6의 아해도. — 모두 무섭다고 그리오.
동굴 안은 이상했다.
공간이 제 방향을 잃은 것 같았다. 앞으로 걷는데 뒤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내 발소리인지 남의 발소리인지. 벽에 그림자가 있었는데 내가 멈춰도 그림자는 한 발짝 더 움직였다. 나는 그것이 무섭다기보다는 부끄러웠다. 그림자보다 느린 사람이 된 것 같아서.
꽃다발은 언제 들고 왔는지 아직 손에 있었다.
귀걸이 상자는 가장 깊은 곳에 있었다. 다른 까마귀들이 모아둔 것들 — 단추, 동전, 누군가의 반지 — 사이에. 까마귀의 동굴은 생각보다 슬펐다. 빛나는 것들을 모아두는 건 좋아하지만 쓸 줄은 모르니까. 나는 상자를 집어 들고 뒤돌아섰다.
밖으로 나오니 별이 떠 있었다.
문자가 왔다.
다 끝났어. 들어가는 길이야. 오늘 왜 야근인지 물어봐줘.
나는 웃었다.
그녀가 돌아왔을 때 꽃은 물을 먹고 싱싱했다. 귀걸이 상자를 그녀 앞에 밀었다. 그녀가 뚜껑을 열었다.
"어디서 났어, 이거?"
"까마귀한테서."
그녀는 이상한 사람 보듯 나를 봤다.
나는 설명하지 않았다. 그 렌즈로 찍었더라면 참 좋았을 장면이었다. 하지만 눈이 있었다. 눈으로 찍으면 된다. 조리개도 없고 셔터도 없지만, 지워지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더 낫다.
우리는 잘 살았다.
꽤 오래.